저는 지난 5월부터 8월 중순까지 야고보서를 설교했었습니다. 야고보의 핵심은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말이나 삶에 있어서 “삶으로 살아내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말씀을 준비하고, 강단에서 설교하는 내내 저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너는 네가 설교한 대로 살아내고 있느냐? 너는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나 성도들에게 나를 본받는 자가 되십시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라는 음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저의 연약함을 인정하게 되었고, 제가 제 힘으로는 도저히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날마다 매 순간마다 기도로 나아가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의 이런 부족함을 깨닫게 되자, 다른 사람의 부족함을 볼 때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가 보였습니다. 비판하고 판단하는 마음 대신에 그 사람의 힘든 상황과 어려운 문제들이 먼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더 기도를 하게 됩니다.
한 번은 제 딸과 제 아들이 어떤 일을 가지고 서로 다툴 때, 아버지로서 그 싸움을 중재한 적이 있었습니다. 두 아이들은 서로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집안이 많이 시끄러워졌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두 아이를 조용히 따로 따로 불러서 말을 들어보면 누가 맞고 누가 틀리는지 구별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제 딸아이의 항변을 들어보면 딸의 주장이 다 맞는 것 같고, 또 제 아들의 말을 들어봐도 아들의 주장이 다 맞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교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A라는 분의 주장과 B라는 분의 주장이 서로 충돌했는데, 그 주장이 서로 정반대 일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따로 따로 그 주장을 들어보면 둘 다 맞는 것 같습니다. 성경에 비추어 보면 이래야 한다는 나름 확고한 생각이 다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뭐든지 그게 옳으냐 옳지 않느냐를 가려내는 데만 익숙합니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은 사실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나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고 판단하면 상대방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눈 높이를 낮추어 상대방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안보이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해가 되고 용서가 되고 용납이 되어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신앙이란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믿음의 성숙도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용납하고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공동체는 나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내 생각과 내 기준으로 맞추어야 한다고 주장하면 공동체는 분열되고 맙니다.
좀 더 연약한 지체의 부족함을 담을 수 있을 때, 공동체는 진정한 성숙함의 열매 맺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십자가의 사랑, 한없는 겸손을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연약한 자를 배려함이 이웃 사랑의 첫 걸음입니다. 무엇보다 연약한 자를 배려하고 용납하려면 나 자신의 마음이 가난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죄인됨을 알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이웃의 약함을 배려하고 용납하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함은 이런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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